아베세데르에서 질 들뢰즈는 “좌파라는 것”은 “먼저 세계를 내다보는 것” “멀리 내다보는 것”(우리 동네의 문제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운 제3세계의 문제를 긴급한 사안으로 인식하는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반대로 “좌파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가 제안한 정의는 내 부모님이 구현했던 것과 정확히 반대편에 놓여 있다. 민중 계급과 ‘노동 계급’에게 좌파 정치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감내하는 것들을 아주 실용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다. 관건은 전지구적 관점에서 영감을 받은 정치적 기획이 아니라 항의에 있었다. 우리는 시공간적으로 먼 곳이 아니라 우리 주변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자주 “혁명이 제대로 한번 일어나야 하는데”라고 되뇐다 해도, 이는 다른 정치 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관점에 기반한 것이라기보다는 고된 생활 조건과 참기 힘든 부정의와 관련된 틀에 박힌 표현이었다. 우리는 혁명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는 자문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일이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였기에(“이건 전부 의도된 거야”), ‘혁명’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삶에 그렇게나 많은 불행을 초래한 사악한 힘―우파, ‘부자 놈들’ ‘거물들’―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하나의 신화에 맞서는 또 다른 신화―인 양 초래되었다.

디디에 에리봉, 『랭스로 되돌아가다』, 문학과지성사(2021)

이런 책 읽으면 나도 ‘아카데미’에 들어가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그러기엔 내 이름이 너무 평범하다. 공부는 이름에 ‘디’ 자나 ‘봉’ 자 들어가는 놈들에게 맡겨두고 나는 일본어 조사나 제대로 구분할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지…….

오늘은 북클럽 두 번째 시간이었고 『유언을 만난 세계』 중심으로 두 시간 조금 안 되게 이야기를 나눴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어 좋아요….라는 감상은 너무 1차원적이고 평면적이라는 생각이 곧장 들지만 사실은 거기에 이런 ‘모임’의 열쇠가 있다. 여론과 선전의 첫 단추는 여기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북클럽은 내 나름의 사소한 정치적 활동이고 작고 귀여운 프로파간다 같은 것이다.(이런 생각에 거부감 들 사람도 있으려나? 그러나 상관 없다. 앎은 입안이 아니라 해골 속에 있어서 도로 뱉어낼 수 없다)

다다르다에서 『H 마트에서 울다』 원서가 있길래 한 권 사왔다. 내가 미셸 때문에 원서도 사다 읽고 영어 팟캐스트도 듣고 그대가 나의 귀인입니다 미셸 정미 자우너 씨…….

사람들이 너무 쪼개지고 너무 개체가 되어서 시대적 소명이나 합의된 대의 따위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ㅇㅅ이 말에 깊이 공감하며… 가난하고 약하고 힘 없는 사람들이, 민중의 대다수가 우파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극우적 선택(대개 투표로 나타나는..)을 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좌파에 대한 들뢰즈의 아이디어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정말로 그런 거라면―좌파 정치가 먼 곳을 먼저 내다보는 것이라면, 애초 좌파에 민중/노동계급의 자리는 공동(空洞)이었던 거 아닌가? 김영삼 대통령이 8천억원의 예산을 들여 개도국 원조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본국에서 일어난 장애인 생존권 데모에 침묵했던 것은 ‘좌파적’ 선택인가?(당시 장애인 복지예산은 617억원 정도였다)

‘항의’와 ‘혁명’이 좌파정치의 것이고 그리하여(그럼으로써) 노동 계급의,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라는 기본적인 모델이 한국에서는 더 이상 맞는 테제가 아니라는 느낌도 있다. 중언부언하는 중인 것 같은데 그러니까 한마디로…. 혁명을 ‘신화’의 위치에 앉혀놓는 것 부터가 너무나 “느그들 프랑스니까 할 수 있는 거죠…” 싶다는 거다. 한국의 노동계급에게는 “혁명이 제대로 한번 일어나야 한다”고 읊조리는 것조차 마르크스 이름 아는 제깐놈들인 다음에야 할 수 있는 일이고, 내 출근길이나 안 막히고 순조롭게 회사 다닐 수 있는 것이 소망이요 정의인 판국이라는 거다.

아 오늘도 사람들은 참 부지런히도 불쌍하고 증오스럽고 웃기다…….


Comments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