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e than a feeling

내가 지금보다 어리고 뼈도 없이 물렁했을 무렵, 나는 대학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내 인생에서 만난 최초의 시네필. 신문방송학과 동기였던 그와 나는 같이 교지를 만들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더라? 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사실은 나 시네필이거든.”

시네필? 시네필이 무슨 뜻이더라……. 대충 ‘필’ 자가 들어가니 영화보고 글 쓰는 사람을 말하는 건가. 뜻도 잘 모르면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자기자신을 누군가로 정의하는 사람을 처음 만나봤기 때문에. 내가 자주 어울리던 스무살 언저리 애들 중에는 그런 애가 없었다. 그와 헤어지고 혼자 있을 때 나는 검색창에 ‘시네필 뜻’을 입력하고 버튼을 눌렀다.

시네필; 영화광을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cinema와 phil(사랑한다는 의미의 접미사)을 바탕으로 한 조어다. 단순히 영화를 좋아하는 팬이 아니라 “장르를 불문하고 영화 자체를 각별히 사랑한다.”는 의미를 담아 사용된다. 영화 작가, 영화 감독들은 대부분 시네필이다.

영화광, 영화광, 영화광이라……. 뜻을 알게 되니까 그애가 더 멋져보였다. 어느 정도로 좋아해야, 얼마만큼의 강도로, 얼만큼의 깊이로 좋아해야 자신의 수준에 ‘광’을 붙일 수 있나? 열광은 단순한 애호와도 다르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대시바의 가장 끝쪽에 있을 것만 같은 낱말. 모든 것을 얕고 짧게 좋아하는 나는 열광이라는 단어가 서툴렀다.

그와 함께 중앙동 구석 건물 꼭대기층에 붙어있던 모퉁이 극장에 처음 찾아갔던 날도 떠오른다. 푹푹 찌는 여름에 4층 계단을 헉헉대며 기어올라가면, 영화포스터 행렬과 함께 작은 철문이 나타났다. 그날의 인터뷰 대상이었던 모퉁이 극장의 대표는, 우리에게 빈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고 각자 ‘인생영화 탑텐’을 적어보라고 했다.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손금 보는 점쟁이처럼 그 사람은 그런 말을 했다.

내 옆의 시네필이 고심하며 순위를 정할 동안 나는 <크리스마스의 악몽>,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런 걸 적어냈었다(하지만 그 누가 이 영화들을 싫어하리오?). 모퉁이 극장 대표가 우리의 인격을 무어라 분석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취재를 마치고 남포동 근처에서 만두찌개를 먹고 내리는 소나기를 맞으며 학교로 돌아왔던 건 기억나는데. 젖은 신발을 버리고 역 근처 다이소에서 오천원 주고 샀던 젤리슈즈가 엄청 미끄러웠던 것도.

그 뒤로 세월은 무장무장 흘러, 나도 시네필도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사는 법을 연구하느라 연락이 끊길 무렵이었다. 그 무렵 대학에 간 내 동생은 가끔 연기수업 같이 듣는 사람들 이야기를 했다. 한 날은, 옷을 맵시있게 입고 연기도 제법 한다는 남자애의 이야기를 들었다.

근데 인스타그램에 자꾸 독립영화 감상평이 올라와. ‘그런 영화’ 보러 다니는 걸 좋아한대.

나는 얼굴을 구기고 최선을 다해 걔랑 멀어지라고 말했다. 왜? 언니는 ‘그런 영화’ 보러 다니는 남자 별로 안 좋아해…….

근데 언니도 ‘그런 영화’ 보러 다니잖아.

‘그런 영화’가 뭘까? ‘그런 영화’는 독립영화, 상업성 없는 영화, 어느 영화관을 가든 작은 관에서만 틀어주는 영화, 그래서 작은 스크린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영화. 그러나 그 작은 관도 관객으로 채울 수 없는 영화. 쓸만한 대사가 나오는 장면이 담긴 캡쳐 몇 장을 보고 시도했다가 끝내 잠이 들고 마는 영화. ‘실험적’이거나 ‘전위적’이라는 평을 듣는 영화. 지루한 영화, 헛소리 영화. 독일영화, 프랑스영화, 누벨바그 영화. 동영상 같은 영화. 긴 영화, 짧은 영화, 턱없이 짧은 영화.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에는 ‘읽고 나서 아무말도 하지 않을 권리’라는 챕터가 있다. 나는 책을 읽고 나서 입을 다물어 본 적이 없다. 늘 떠들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하느라 깔았던 각종 독서어플과 SNS……. 그러나 영화에 대해서라면.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후의 침묵에 대해서라면 나도 조금 알지.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조용한 극장에 대해서라면. 영화 한 편이 끝난 후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에 대해서라면.

‘그런 영화’들을 보고 ‘그런 마음’이 들 때면 언제나 대학시절 내 옆의 그 시네필이 생각났다. 입을 다물게 되는 영화를 보러다니는 행위는 그에게 받은 유산 같은 것이므로.

어제는 그래서 기쁜 날이었다. 오랜만에 그와 길게 연락을 했으므로. 내게 영화를 가르치고 음악을 알려줬던 그는 이제 도쿄에 산다. 나는 아직도 7년 전 그에게 선물 받은 스피커로 음악을 듣고 여전히 그가 알려주는 음악에 매료된다. 이제 그만 자러가야겠다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도 오랫동안 카카오톡을 붙잡고 그애의 프로필 뮤직 리스트를 옮겼다. 블러부터 나카모리 아키나, 듀크 엘링턴과 어떤날을 넘나드는 대중없는 그의 플레이리스트가 너무 좋아서 오전내내 틀어두고 노트북 열어 이걸 쓰고 있다.

아직까지도 이십대 초년의 그애 모습이, RHCP의 첫 기타 리프를 들으며 고개 흔드는 모습이나 눈 감고 빌에반스 듣는 모습이 애쓰지 않아도 떠오르는 게 좋다. 젊어서 참 좋았구나, 우리가 젊을 때 같이 있어서 참 좋았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It’s more than a feeling!).

도쿄에 사는 조그만 체구의 시네필 여인이 무사태평한 하루를 보내길 바라며…….

친구의 플레이리스트 바로 가기 (apple music)


Comments

“More than a feeling”에 대한 5개의 응답

  1. 예빈아 글 잘 읽었어. 정말 멋진 글이다 🥹 나도 얼마 전 비가 많이 오는 날에 네가 샀던 젤리 슈즈 생각했었어. 그 젤리슈즈는 어떻게 됐을까 하고…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예빈이는 나한테 너무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나만 절친한 친구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내 마음을 전부 보여줘도 되는지 늘 혼자 재고 따졌던 것 같아. 나는 너무 서툴고 비겁했었거든. 이제야 조금 나를 드러내고 사람과 관계를 아끼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는데, 너와는 물리적으로 너무 멀어져버렸네. 하지만 언젠가 너한테 준 편지에도 쓴 적 있듯이 함께 있지 않더라도 늘 서로의 영향 아래 있고, 마음으로 통하는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나한테는 그게 바로 너야. 그래서 너에 대한 그리움, 미안함, 후회 모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 거야. 블로그 자주 들를게. 우리 꼭 다시 만나자 !!

    1. ㅠㅠ 어머나 옹헤야… 여기 덧글 다는 거 여러모로 구찮았을텐데 고마워. 난 요즘 매일 일본어 공부를 하는데 할 때마다 니 생각을 해.. 존나 어려운데 어떻게 이걸 다 외우고 타국 가서 직장까지 다니다니 역시 넌 짱이야.. 내 마음 속 천재 1위! 여름에 만나면 만이 닭꼬치를 잇는 꼬치집을 찾으러 떠나보자 ♥

      1. 겸손 떠는 게 아니라 나 일본어 진짜 많이 부족해,,, 그리고 슬픈 게 외국어를 공부하면 한국어가 퇴화하더라 ㅋㅋ ㅠ 나 구글 맵스로 맛집 구경하는 거 취미인데 너 온다길래 야끼토리집 검색해봤어 ㅋㅋㅋ 만이닭꼬치 생각나서! 여행 일정 나오면 알려줘 예빈아 🥰 글구 너 괜찮으면 도쿄쪽에 있는 동안은 내 쉐하에서 묵어도 돼 (사실 그래줬으면 좋겠어,,,) 집주인이 3일까지는 딴 사람 데려와서 같이 살아도 된다고 했음 ㅎㅅㅎ 같이 요리도 해먹고 음악도 듣고 하자

        1. ㅋㅋㅋㅋ너 왜케 기엽냐. 나야 완전 좋지 쥰나 재밌겠다 교지실 2탄 가보자고~~~!!! 일본어는 빙산의 일각만 봤을 때는 쉬워보이는데ㅎ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골때리는듯; 나 어제 ‘~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때문에 골머리 앓았엉;; 나케레바나라나이~

          1. ~나케레바 나라나이 뭔가 일본식 표현의 정수 중 하나라고 생각함… 그냥 해야 한다!라고 말하면 될 걸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돌려 말해야만 하는,,,
            나도 형용사 변형 て 변형 배울 땐 몰랐지 일본어에 깊고도 너른 심연이 있다는 사실을 😭 글두 일본어 재밌어 한국인 입장에서 그나마 배우기 쉽기도 하고!!
            예빈하카세 간밧떼구다사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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