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스로 되돌아가다

우디 앨런 영감탱의 영화를 틀어두고 곁눈질로 보면서 쓰고 있다. 티모시 샬라메 나오는 그거..ㅋ 이 성범죄자의 초기작도 아니고 근작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왓챠가 볼만한 푸랑스 영화 다 내려버려서 백인들이 주절대며 주접떠는 영화를 볼 수가 없음; 아무튼 주인공은 뉴욕에 가게 되어서 기쁘고 설레 보인다.(센트럴파크? 맨해튼? 소호? 브루클린?) 질리지도 않는 뉴욕 찬가… 나도 데려가 시발;

아무튼 .,.. 내일은 한 달 밀린 도서관 책 반납하러 정말로 가야하므로 그전에 몇 부분 옮겨놓고 싶어서 노트북 폈다.

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문학과지성사(2021)

“사회학 교육을 받기 전에 내가 어떠한 ‘계급의식’을 갖고 있었는지 떠올려보려고 해도, 나는 거기에 어렴풋하게만 다다를 수 있을 뿐이다. 시간적인 간격 때문에 대상이 명료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근대 사회의 개개 구성원이 전체 사회에 내재하는, 계급이라는 이름의 명확히 규정된 집단에 소속 의식을 가진다는 사실은 제대로 입증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계층화된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객관적 현실이지만, 자의식을 가진 계급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내가 보기에는 계급 소속감의 부재가 부르주아의 유년기를 특징짓는다는 점이야말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지배자들은 그들이 특정한 세계 안에 위치지어져 있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한다(이는 백인이나 이성애자가 스스로 백인이나 이성애자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러한 언급은 있는 그 자체 명백한 의미를 갖는다. 즉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기술하고 있을 뿐이면서 사회학을 하고 있다고 믿는 어떤 특권층 인사가 내놓은 순진한 고백인 것이다.

p. 112

역설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나는 국민전선을 지지하는 표가 부분적으로는 자신들의 집합적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서민층의 마지막 호소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항상 짓밟힌다고 느껴왔고, 이제는 한때 자신들을 대표하고 방어하던 자들에 의해서까지 짓밟히고 있다고 느끼는 이들의 존엄성을 수호하려는 호소 말이다.

존엄성은 그 자체 취약하고 불확실한 감정이다. 그것은 신호와 보증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통계나 회계 파일 속의 단순한 요인이나 무시할 만한 양, 그러니까 정치적 결정을 말없이 감수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기를 요구한다. 모종의 신뢰를 보내던 이들이 더 이상 그럴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일 때,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로 그 신뢰를 돌린다. 그때그때 새로운 대표자들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지막 호소가 그러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런 방식으로 유지되거나 재구성된 ‘우리’의 의미가 ‘부르주아’에 대립하는 ‘노동자’보다는, ‘외국인’에 대립하는 ‘프랑스인’을 가리키는 지경으로 변화했다면,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 ‘부르주아’와 ‘노동자’의 대립이 ‘가진 자’ 대 ‘못 가진 자’라는 대립 형태로 이어지면서(이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며 동일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오지도 않는다) 민종적 인종적 차원을 통합했다면, 과연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가? 가진 자는 이민을 부추기는 것으로 비추어지고, 못 가진 자는 모든 악의 근원인 이민 때문에 일상생활 속에서 고통받는다는 식의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p.152

1960~70년대 부모님의 담론, 특히 어머니의 담론에는 이미 ‘그들’과 ‘우리’를 분리하는 두 가지 형식, 그러니까 계급적 분할(부자와 가난한 자)과 인종적 분할(‘프랑스인’과 ‘외국인’)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모종의 정치적 사회적 정황이 둘 중 어느 한쪽으로 방점을 옮겨놓을 수 있었다. 68년 5월 대파업은 출신과 관계없이 ‘노동자들’을 ‘기업가’에 맞서 연대하게 했다.

“프랑스 노동자든 이주 노동자든 동일 고용, 동일 투쟁”이라는 멋진 슬로건이 기세를 떨쳤다. 뒤이어 벌어진 제한적이고 국지적인 파업에서도 마찬가지 관점이 우세했다(그런 상황에서 경계는 파업 참가자들과 기업가 편에 선 이들, 즉 ‘어용’ 사이에 그어졌다).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파업 전에 프랑스 노동자는 자연스러운 인종주의자로서 이민자들을 불신하지만, 일단 행동의 방아쇠가 당겨지면 이러한 악감정들은 사라지고 연대(부분적이고 잠정적인 것일 지라도)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인종주의적 분할이 계급적 분할을 대신하게끔 만드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결집의 부재, 또는 결집/연대하는 사회집단에 속해 있다는 자의식(정신적으로는 항상 결집되어 있고, 잠정적으로 언제든 결집 가능하다는 지각)의 광범위한 부재이다. 좌파가 자의식의 지평이 되어주었던 결집을 파기해버리자, 이번에는 집단이 다른 원리, 즉 민족적 원리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빼앗기고 추방당했다고 느끼는 영토의 ‘정당한’ 점유자로서의 자기 확인으로, 이제 그들이 사는 동네가 작업장과 사회적 조건을 대체해 그들 자신을 규정하고 그들이 타자와 맺는 관계를 규정한다. 또한 그들의 자기 확인은 더 일반적으로 국가의 당연한 주인이자 소유자로서, 국가가 시민에게 부여하는 권리들에 대해 배타적인 수혜를 주장한다. ‘타자들’이 이 권리들-실제로는 거의 갖고 있지 않은데-을 통해 혜택을 본다는 생각은, 그것들을 나눠 가져야만 하고 그리하여 각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줄어드는 것처럼 비칠수록,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즉 이러한 자기 확인은 ‘민족국가Nation’에의 정당한 소속이나 동등한 권리부여를 부정당하는 이들[즉 이주민, 난민 등]에 대해 적대적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그 권리는 대문자 권력과 우리의 이름 아래 발언하는 자들이 문제 삼는 순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유지하고자 하는 권리인 것이다.

p. 169

상처를 가하는 모욕의 힘을 영원히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고프먼을 따라 말하자면, 낙인을 전복시키거나 모욕을 재전유하고 재의미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상처를 입히는 욕설의 작용과 그것의 능청스런 재전유 사이에서 항상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살아간다. 우리는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자유로워질 수도 없다. 우리는 사회 질서와 그 예속화하는 힘이 매 순간 모든 이에게 가하는 무게에서 어느 정도까지만 해방될 수 있을 뿐이다.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윅이 훌륭하게 표현한 것처럼, 수치심이 ‘변형 에너지’라면, 자기 변형은 과거의 흔적들을 통합하지 않고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를 보존한다. 이는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그 세계에서 사회화되었기 때문이고, 그 과거가 우리 안에 상당 부분 현존해 있으며,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여전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거는 여전히 우리의 현재다. 따라서 우리는 표명되고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재표명되고 재창조된다(무한정 재착수해야 하는 과업처럼).

결국 변화와 ‘행위능력(agency)’을 결정론이나 사회질서 및 성적 규범의 자기 재생산적 힘에 맞세운다든가, ‘자유’의 사상을 ‘재생산’의 사상에 맞세운다든가 하는 것은 소용 없는 일이다. 이러한 차원들은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고 얽혀 있고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정론을 따른다고 해서 아무것도 변화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통과 그것의 반복을 의문에 부치는 이단적 활동의 효과는 제한적이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전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방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언가를 전복한다고 해도 그것은 특정한 시점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우리는 살짝 이동하고 옆으로 한 보 옮겨 편차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푸코식 용어로 말해, 불가능한 ‘해방affranchissment’을 꿈꾸지 말아야 한다. 기껏해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제도화되어 우리 존재에 속박을 가하는 몇몇 경계를 돌파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주네에 관한 책에 나오는 다음 문장이 내겐 핵심으로 다가왔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가지고서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금세 내 존재의 원칙을 구성했다. 자기에 대한 자기의 작업으로서 수행의 원칙.

p.257~8

음.. 오랜만에 읽어보는 힘 있고 정당하고 용기로운 존.잼 자기고백적 사회학 도서였음

이럴 때 보면 ‘가진 것 없음’이야 말로 가장 든든한 뒷배인 것 같다(지배계급에 대한 개막말에서 나오는 통찰이 얼마나 귀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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