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정신적 무지외반증으로 살텐가?

오랜만에 한국 소설 읽다가 한국인이 쓴 책 읽으면 자1살 생각 밖에 안 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지하철에서 내렸는데 어떤 남자가 유성온천역사 안에 놓인 벤치에 앉아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앉은 자리에는 이미 빈 캔이 세 캔 있었고 그 옆에 여섯개들이 카스 한 묶음이 포장지 뜯겨진 채 놓여있었다. 엊그제는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어떤 아저씨가 뒤에서 연거푸 스쿼트를 했다. 정확한 자세와 올곧은 표정으로 허벅지를 어깨넓이로 벌리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했다.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그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새삼… 우리들의 행동양식이 무척 균일화되어있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다가왔다. 1. 서 있기 2. 앉아 있기 3. 걸어가기 4. 휴대폰 쳐다보기 이 네 가지 선택지를 벗어나는 행위를 하는 사람만이 지하철의 익명화 마법에서 벗어나 비로소 개인으로 드러나게 된다. 지하철 광인들에게는 얼굴이 있다.

가게에서 빈둥거리고 있는데 ㅊ오빠(그렇다. 나에게도 아직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긴 하다…)에게 안부 연락이 왔다. ㅊ오빠는 4년 전, 거의 매일 밤 베이스먼트에서 만나 술 처먹고 어울리던 이들 중 하나인데, 어느 날 갑자기 소리소문 없이 장전동 발길을 뚝 끊고 우리들의 밤놀이 일상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추억 속 인물이다. 너무 반가워 그간 어떻게 지냈냐고 물으니, 한 여자에게 미쳐 결혼계획까지 세웠으나 환승이별 당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뜨거운여름밤은가고남은것은볼품없지만) ㅊ오빠에겐 안 된 이야기지만 온 마음을 바쳐 사랑도 해보고 참으로 부럽기 짝이 없구나, 호강이 넘쳐 요강에 똥을 싼다는 생각이 들었다. 씨..벌…

뉴스를 열 때마다 사회적으로 자살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대가리를 관통한다. 김풍인지 김행인지 새로 내정되었다는 여가부 장관은 제정신이랄 게 드라마틱한 엑시트를 해버린 것 같고… 또 한 명의 여자를 욕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슬퍼졌다. .. 극악의 출생률로 느린 자살을 하고 있는 한국이라지만 이따위 나라에도 어쨌든 아기들은 계속 태어나고 있다. 어저께는 사촌언니가 무슨 클래스 들으러 가야 한다고 해서 그녀의 아기들을 돌봐주러 일어나자마자 도안동에 행차했다. 언니는 그새 또 하나의 아들을 낳았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들은 잠을 자지 않고 악을 쓰며 울어댔다. 전날 두 시간 밖에 수면하지 못한 나는 제발 아기가 잠에 들길 바라며 연신 아들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손바닥으로 정수리부터 눈썹까지 쓸어내리면 아들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아들은 생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아직 두개골이 열려 있으니 정수리는 조심해서 만져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민감하고 약한 부분을 내맡기기에 나는 별로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아들을 그렇게 가까이 여기지 않고 아마 아들의 성장과정에서 서서히 배경처리 될 인물일 테다. 그럼에도 내가 저렇게 약하고 작았을 때에 나의 이마를 만져주었던 사람도 있겠다는 생각이, 지금으로선 내게 그이의 흔적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지만 그런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약간의 존엄을 느꼈다.


Comments

“언제까지 정신적 무지외반증으로 살텐가?”에 대한 2개의 응답

  1. 박사님 글 기다렸어요..🥹

    1. 누군가 기다려줘서 다시 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