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가운데

엊그제 초저녁 백델 책을 읽다가 살풋 잠이 들었는데, 완전히 정신이 감기기 전에 아빠가 집에 들어온 걸 봤다. 너무 졸려서 방문을 잠그지 않고 잤더니 바로 아빠에 대한 악몽을 꿨다. 아빠의 막냇동생인 국표삼촌(국민투표날에 태어나서 국표임)과 어떤 카페 같은 곳에 앉아 서로 악다구니를 써대며 니가 더 최현성(애비의 실명)이랑 닮았다고, 너는 완전히 느그형/느그아빠를 쏙 빼닮았다고 싸워대는 꿈이었다. 내가 꾸는 악몽들의 패턴은 대개 이렇듯 누군가와 말싸움을 하는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꿈에서 말싸움을 할 때면 미치도록 억울하고 답답하여 사력을 다해 항변하게 되는 데, 그게 너무 진이 빠지고 분이 나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 눈물이 난다. 그러다 깨면 <이해받지 못함>의 기분이 전신을 휘감는데 그 거지같은 기분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런 기분을 겪을 때면 꼭 그 기분이 평생토록 지속될 거처럼 느껴져 우울이 복리로 늘어난다.

아빠랑 대화한 것도 아니고 눈 마주친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아빠의 존재를 인식했을 뿐인데 바로 악몽으로 동기화 된다. 이제 아빠는 내 꿈에 등장하지 않고도 악몽의 주제를 제공하는 경지에 올랐다.

어제는 삼성동 보람 작가님 네에 가서 진수성찬을 얻어 먹고 알렉스가 신애 발 씻겨주는 것도 봤다. 신애는 꼭 협박 받은 사람처럼 발씻김을 당하고 있었다. 어렸을 땐 왜 그런 게 안 보였을까? 저렇게 대놓고 존나게 싫어하고 있는데……. 아무튼 보람 작가님 집이랑 작업이 너무 좋아서, 뭔가 인생에 대한 기대감 한 스푼, 희망 맛보기 스푼이 느껴졌다. 그리고 바로 오늘 작가님과 같은 삼성동에 집 구함;

토요일에 대전 퀴퍼 갔다. 내 생애 첫 퀴퍼… 행진에 합류하고 싶어서 소리들 알바 끝나고 대전역 쪽으로 열나게 걸었다. 대전역 지하차도에서 막 빠져나온 행렬이 다만세를 틀고 목척교 쪽으로 가두행진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반대 차도에 있었기 때문에 저쪽으로 가려고 지하 차도로 내려갔는데(대전역 앞엔 횡단보도가 없다), 반대쪽 차도로 나오는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음악 소리가 더 커지고 계단 바깥으로 보이는 깃발들, 위풍당당 걷고 있는 존나 이상한 사람들 때문에 가슴이 고양됐다. 정말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계단을 오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리추얼이란 참 중요한 것이야…….

그러고 세종 가서 냉면 먹고 욜탱 와서 홍예당들과 맥주 한 잔 하고 궁동으로 가서 산타크로스와 더랜치펍과 하울앳더문에 갔다. 절제를 모르는 놈처럼……

어떤 사람의 뒷모습은 나로 하여금 매번 또 이렇게 남겨졌다는, 저 사람은 영원히 떠났다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일만 번의 내일이 밝고 그 사람이 일만 번 다시 온다 해도 일만 한 번 째에는 오지 않을 것 같다. 아무도 버리지 않았는데 혼자 버려짐; 유기당했다는 확신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르겠다. 또 떠난 사람 등 보는 사람이 되었다는 마음이 들 땐 가만 서서 난도질 당하고 있는 거 같은 기분이 든다. 다른 데로 갈 수 없고 발을 떼는 방법도 모르겠어서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건 눈을 질끈 감는 것 밖에 없다고…. 그냥 처맞고 쓰러져서 누워있다가 좀 회복되면 다시 서서 칼을 기다려야 하는 것 같다. 이런 무력함이 이번 생의 내게 주어진 벌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이미 결정된 일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합니당; 다들 조심하시고, 심장 부여잡고 다니시길.


Comments

“삶의 한가운데” 에 하나의 답글

  1. 저도 아바이 때문에 올해 집 나갑니다.. 공감 가서 댓글 남기고 가요

익명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