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라는 아리송한 땅에 떨어진 지 어느덧 17일 째… 한국이었으면 물놀이 시동 걸었을 이맘때에(해운대보내줘시발…) 아침부터 후리스 주워입고 거실 탁자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다. 물론 여기는 일년 내내 온화한 기후를 자랑한다는 브리즈번이기에 한낮 온도는 20도를 넘나들지만 추위에 예민한 내 뼈는 이미 가을을 감지하고 아침저녁으로 겉옷을 요구하고 있다.
어제는 드디어 집을 구해 이사를 했다. 호주 와서 숙소만 4번 바꿨다. 처음엔 시드니에서 관광 겸 호주생활 적응할 요량으로 대충 시티-공항 중간 즈음에 에어비앤비를 일주일 정도 빌렸다. 결론적으로, 관광도 안 했고 적응도 못 했다. 옆 방을 쓰던 중국인 커플과 살짜기 동북아시아의 정을 나누고 인스타 아이디를 교환하였으나, 그들은 캔버라로 떠나고 우리는 브리즈번엘 왔다. 여하튼 시드니 숙소는 주방에서 바퀴벌레 시체도 목도하고 화장실에서 아기 곱등이들이 출몰했지만 딱히 불편하거나 나쁘다고 느끼지 않았다. 다만 다른 방을 쓰는 에이샥이라는이름의영국인이 본인 요리할 때 사용한 주방 기구들을 제때 치우지 않아서 그점이존나불편했음; 하지만 그는 요리를 정말 잘했다… 걔가 오븐에 구운 당근과 감자를 안 치우고 계속 여봐란듯이 부엌에 내놔서 배은채랑 한 두 개 몰래 집어먹었는데 존나 야채에서 어케그런 미친크리미한 맛이 나는지 귓전에 요리왕 비룡 브금이 절로 흐르더라;
브리즈번으로 와서는 왜인지 사람들과 인터랙션이 필요할 것 같아 YHA백패커스를 잡았다. 근데 사실 남이랑 그렇게 친해지기는 또 싫어서 2인실 씀; (결론: 아무랑도 안 친해짐) 그래도 여기는 걸어서 15분이면 시티로 나갈 수 있어서, 여기 있는 동안 어학원도 알아보고(결론 : 안 다니기로 함) 스퀘어도서관에서 하는 무료 English conversation class도 참여해보고(결론 : 다시는 안 가기로 함) 여러가지로 살면서 한 번만 해봐도 될 듯한 경험들을 했다. 그리고 신전떡볶이도 먹음ㅠㅠ 남은 국물로 볶음밥까지 야무지게 해 먹다. 마침 브리즈번 시티에 있는 NAB에 한국인 직원이 있어서 존나 편안~하게 계좌 개설하고 생활비용 공용 계좌까지 텄다. 고마워요 미스터 다니엘 최. (사실 한국 오기 전에 커먼웰스 계좌 신청해놨는데 시드니에서 현지 직원이랑 소통이 도무지 안 돼서 걍 은행 바꿈; 다신 만나지 말자구요 Mr. Samin)
근데 백패커스 가격이 백패커스 답지 않게 너무 비싸서(물론이건우리가2인실을쓴죄도있다), 인스펙션 다니고 집 구하는 동안 임시 숙소로 머무를 에어비앤비를 예약했다. 데이비드라는, 살사 댄스 강사라는, 웬 백인 호주 할배가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집이 무슨 전포동 업타운에 버금가는 경사를 가진 hill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뭔가 집이랑 기운이 안 맞아서 그 집에 들어갈 때마다 존나 우울해지고 기분이 땅에 처박히는 느낌이 듬. 그래서 이틀 동안 인스펙션 네 개 보고 재빨리 이사했다.
보통 호주에서 쉐어 구하는 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째는 플랫메이트 어플을 이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해당 지역 페이스북 그룹에 올라오는 글을 보고 컨택하는 것, 마지막으로는 썬브리즈번에서 한인 쉐어를 구하는 것이다. 근데 썬브리즈번 서버 존나 후져서 무슨 게시글 두 개 보는 데에 로딩이 10분이 걸림; 그러면서 클릭 한 번 할 때마다 광고가 와다다닥 뜨는 게 진짜 서버 운영자 딱밤 때리고 싶더라. 썬브리즈번에서 주당 350불 짜리 마스터룸 공고 보고 인스펙션 하러 써니 뱅크까지 갔는데 집 컨디션에 넘 충격받아서 다시는 한인과 접점을 만들지 않기로 다짐함; 한 집에 열 명도 넘게 사는 것 같은데 다들 자기만의 세탁세제를 갖고 있어서 런드리룸에 똑같은 세탁세제가 줄지어 서 있음… 공용공간에 드리운 쓰레기의 그림자와 다들 자기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모습 모두가 너무나 한국의 그것이라 도망치듯이 나왔다.
페이스북으로 구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은데 나는 2015년 이후로 페이스북을 안 썼기 때문에… 광고글이나 스캠 거르는 방법을 잘 모르겠어서 접속을 잘 안 하게 됨.
내가 추천하는 방법은 플랫메이트 프로필을 정성껏 만드는 것이다. 활짝 웃는 얼굴 사진 골라서 걸어놓고 자기소개를 존나 나이스하고 타이디한 사람처럼 적어두면 집주인들이 먼저 컨택을 해온다. 이 집도 그렇게 구했다. 처음엔 조건이 너무 좋아서(주당 400불에 침실, 바쓰룸, 키친 다 딸린 하우스/모든 빌 포함/주인 세대와 엔트리 분리) 백타 사기라고 의심했는데, 속는 셈 치고 인스펙션 왔다가 이곳이 왜 아직도 안 나갔는지 알게 되었다.
하우스 2층을 쓰는 노년의 주인 부부가 존나게 엄격한 힌두였던 것이다. 그들은 100% 베지테리안이고 자신의 집에서 고기를 요리하는 냄새가 나지 않길 원했다. 노 파티, 노 스모킹까진 들어봤어도 노 미트는 처음 들어보았다. 물론 이 분들은 앞의 두 개도 원하셨음. 우리는 좋은 집에 눈이 멀어 논스모커라는 희대의 구라를 쳤다…; 이 집이 우리의 첫 인스펙션이었기에 일단 후보로 놔두고 다른 집들을 더 보려고 했는데 다른 집을 보면 볼수록 오직 뇌리엔 힌두집만 떠오르고 존나 간절해짐. 결국 인스펙션 바로 다음날 힌두 할배한테 우리 너네집 살고 싶다고 문자 보냈는데 ㅋㅋ 할배가 ㅋㅋ 그럼 너네 여권사본이랑 ㅋㅋ 레주메랑 ㅋㅋ 부모님 디테일 ㅋㅋ 적어서 가져오라 해서; 그날 밤 존나 급하게 오직 할배만을 위한 레주메 및 커버레터를 만들었다(bar staff 같은 경력 다 삭제함). 유튜브로 급하게 힌두문화 공부도 해감 ㅠ ㅠ; 내돈내고 들어가는 건데 면접까지 봐야하다뇨.. 하지만존나열심히준비했습니다.
다행히 할매 할배가 우리를 마음에 들어해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this house를 겟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할매가 존나 잘해줌.. 면접ㅋ 보러 간 날 점심도 해주고 (본인은 금식하는 날이라며 손도 대지 않음) 할배가 존나 깐깐하게 굴 때마다 에그랑 치킨은 먹어도 된다며 편들어줌… 마치 라잌 나의 오스트레일리아 마마ㅠ 키친웨어 없다했더니 이케아에서 냄비, 후라이팬, 접시, 밥그릇, 컵, 치즈갈갈이 기타등등 심지어 주식이 머냐고 물어보고 라이스쿠커까지 사다줌. 한국에서조차 이케아 키친웨어를 써본 역사가 없는데… 후라이팬? 다이소 가서 3천원 주고 사오는 게 국룰 아니냐고; 심지어 이불이랑 이불 커버까지 사다 주시다… 왜이렇게 잘해주냐니까 너네가 내 칠드런 같아~ 이캐서 배은채 눈물 흘림 ㅋㅋ 이미 머릿속에 이 노인들 한국에 초대해서 비빔밥 대접하는 상상까지 완료함;
인도인 집주인/카 딜러 거르라는 경고 존나 많이 들었지만… 세상사 편견에 엿을 먹이는 흔쾌한 경험을 하게 되어 기쁠 따름입니다. 이제 주거가 안정되었으니 책도 좀 읽고 일기도 쓰고 음악도 듣고 하여튼 인간의 삶을 영위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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