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엄마가 도어락 전자출입키 하나가 없어졌다고 난리를 피웠다. 어제 도어락 교체해준 열쇠공이 가져간게 분명하다며, 그걸 갖고있다 우리 집에 침입하려는 계략일거라느니, 여자가 있는 집이라는 걸 알고 나쁜 마음에 가져간 거면 어떡하냐느니 또다시 예의 히스테리를 부렸다. 제발 그런 망상 좀 집어치우고 날 좀 자게 냅두라고 말했지만 이미 강박에 발동이 걸려버린 엄마는 아침 내내 집안을 종종거리고 돌아다녔다. 그러다 결국 쓰레기통을 뒤져 (자기가 버리고도 까먹은) 전자키를 찾아내고서야 열쇠공의 누명을 벗겨주었다.
덕분에 나는 피곤을 완전히 털어버리지도 못하고 눈두덩이에 잠이 잔뜩 묻은 채 깨어.. 슬이언니 아들 돌잔치에 갈 준비를 했다. 얼음 세 개를 비닐 손장갑에 넣고 연신 퉁퉁 부은 눈알을 문질러 졸림을 닦아냈다. 천년만에 전생의 유물 같은 마스카라질도 하고 엄마가 좋아하는 차림새로 집을 나서주었다. 신발은 다 헐어서 헤진 벤시몽 스니커즈를 신어서 빈축을 샀지만… 그게 좋은 걸 어떡해; 난 신발을 잘 못 버리겠다.
잔치에 가니 수련회 레크레이션 강사만도 못한 MC가 쩌렁쩌렁 마이크를 울려가며 돌잡이, 복권추첨, 아기에 관한 TMI OX퀴즈(우리 아기의 이는 네 개다! O? X?) .. 따위들을 진행했고, 내가 귀 막고 인상 찌푸리는 동안 아기는 돌상에 널린 수많은 사물들(요즘엔 돌상에 마우스도 올려놓드라.. 개발자 되라구) 중 돈을 골라잡았다. 그애의 부모가 바랐던 대로였다.
이런 한국의 공장식 관혼상제 속에 들어와 있을 때마다 이방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내 인생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신내림에 가까운 예감이 들어서인지 상황 속에 동화되지 못하고 자꾸 관조하게 된다. 나도 나름 사람 노릇 한다고 아기 신발 한 켤레 사갔는데도 아기의 첫 생일을 축하하러 온 모든 사람들과 동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번갯불에 콩 튀겨먹듯 진행되는 잔치(사유: 두 시간 후 또다른 아기의 잔치가 예매되어 있음)와 모두들 이 암묵적인 합의를 이해하고 잽싸게 뷔폐밥을 먹어치운 뒤 밥값을 치르듯 아기의 부모에게 돈봉투를 내고 퇴장하는 모습이 너무나 기괴한걸..? 그와중에 외할머니는 나에게 찹쌀 경단을 한 접시 가득 가져오라고 한 뒤 미리 챙겨온 비닐봉지에 우겨넣어 싸갔다. .. 대체.. .. ㅋㅋ.. 할매는 그렇게 경단을 두 접시나 챙기고도 “아휴 나는 빨리 죽고 싶엉” 염불을 외웠다. 죽고싶지만 찹쌀떡은 먹고싶엉;…
여튼 그렇게 돌잔치 들러 어른들에게 넌언제결혼하냐 공격을 10회 가량 받은 뒤 출판도시 인문학당 강연 들으러 삼요소 갔다.
유성원 작가와의 만남이 너무 소중됐다. 건강이와 안건강이의 구분을 넘어 이 사람은 거의 보살이 되어가고 있구나 느꼈다.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서 그런 책이 나왔지? 생각했는데, 그런 책을 썼으니 이런 사람이 된 거겠지 하는 마음이 금방 따라붙었다. 폐허가 자주 되어 보았던 사람의 마음은 성전이 되는가? 그리고 난다가 근무조건 너무 좋은 출판사라는 걸 알 수 있었고..(대표의 성정만큼이나 화끈해보이는 파격적인 근무조건.. 출퇴근 의무 아님…) 출판계의 폐쇄적 구조 또한 다시금 실감했다.
그런데 난 왜 또 출판따리 어쩌구 근처를 어물쩡 대고 있는 거냐? 이제 그쪽에 남은 미련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출판사 다닐 때 우울증 너무 심했고 스트레스 존니 받았는데 이젠 또 이런 생각이 듬.. 남의 출판사를 다녀서 스트레스 받은 거 아닐까?ㅎㅎ 내 출판사 채리면 .. 되는 거 아닐까?… 근데 정말로 책날개 없는, 똥종이 쓰는 페이퍼북 전문 출판사를 차리는 게 내 오랜 바람이긴 해…
아무튼 오랜만에 몇 시간 동안 앉아 다른 사람의 말에 온전히 집중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유성원 씨는 농담도 참 잘 하고 사람 말에 진심을 기울여주기도 하네. 그러면서도 요긴한 말만을 하네. 참 믿고 싶은 사람이네. 초반에 유성원 씨 목소리가 조금 떨린다고 느꼈는데 그게 넘 믿음됐다. 떨리는 목소리는 그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가르쳐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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