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비 생겼다

난 티비를 처음 가져본다

본가에서 티비는 안방에 있었고 엄마나 아빠의 전유물이었으므로…

난 여섯 살 때 아빠랑 채널 싸움하다가 아빠한테 리모컨으로 맞은 기억이 있다

장난으로 툭 친 게 아니라 정말로 분노가 치솟아서 패듯이 때린 한 대였기 때문에

삼십살이 되도록 기억하게 되었다

하지만 양육되는 동안 주로 나를 때린 것은 엄마였는데,

엄마는 때리러 오기 전이면 늘

본인이 나를 족칠 것임을 미리 알려주곤 했다

“오늘이 니 타작하는 날인 줄 알어”

매번 이 대사였다

내가 뭔가 맞아야 할 이유가 생겼을 때 엄마는 회사에서부터 미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 저렇게 말했다

그러면 나는 엄마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공포에 떨며 매를 기다렸다

어린이는 이런 식으로 ‘타작하다’ 라는 단어를 습득했다

엄마는 주로 구두주걱으로 나를 때렸는데

그렇게 맞는 동안 내 안에서도 무언가 낟알 같은 것이 떨어져

추수되었던 것 같다

반면 아빠가 나를 물리적으로 때린 것은 딱 두 번인데(내가 기억하는 한)

한 번은 위에 적었듯 리모컨 싸움으로 인한 것이었고

나머지 한 번은 건양대 병원에서

할머니 검진 받는 데 따라간 내가 하도 울고 떼쓰니까

아빠가 음료수 사준다고 회유해서 비상구로 데려가

비상구 문 뒤에 나를 세워두고 여기저기 때렸던

그런 유괴틱한 기억

아무튼

집밖에 나와 있을 때 티비가 배달되었다는 문자를 받고

너무 기뻐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마음이 들떴다

한 시간 동안 여러 난관을 거쳐 거치대를 조립하고 티비를 설치한 뒤

넷플릭스를 연결해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를 틀었다

옛날 드라마들은 어쩜 제목들을 이리 짓는지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네 멋대로 해라

똑바로 살아라

밥줘

소주 한 잔 걸치고 인간살이에 대한 개똥철학을 설파하는

그러나 어쩐지 진상처럼 느껴지지가 않는

학번이 9나 8로 시작하는

브랜드 아파트에 거주하거나 대기업에 재직중이진 않은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것 같은데도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은 늘 사람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그런 과선배가 지은 것 같은 제목들

그리고 나는 이런 제목들도 좋아한다

도둑의 아내

목욕탕집 남자들

포도밭 그 사나이

까치 며느리

저녁으로 샐러드를 만들어 탕종식빵 한 쪽과 곁들여 먹으며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를 5화까지 봤다

영삼이가 소원하던 이소룡 추리닝을

누나 윤영이 홍콩 출장길에 사다줬는데

감동한 영삼이는 윤영이 자는 동안 누나의 발바닥을 안마기로 두드려준다

그런 장면이 웃겼다

그러고 여덟시에 발받침대 겸 스툴을 사러 당근 다녀온 후

<슈퍼배드Dispicable me>를 봤다

난 슈퍼배드 시리즈를 좋아한다

극장에서 슈퍼배드를 처음 봤을 땐

바로 다음 타임 표를 끊어 한 번 더 보고서야 극장을 떠날 수 있었다

슈퍼배드에서 악당 그루는 달을 훔치기 위해 세 딸을 입양한다

버림받거나 상처받은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믿기 위해선

달까지 다녀와야 한다

달까지 다녀오는 것도 모자라

이미 막이 내린 무도회장에 한발 늦게 도착해야 한다

영화에서는 늘

뉘우침에 대한 보상이 확실하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늘 눈물이 나온다

안심해서일까?

감동이란 사실 거대한 안심

그런 게 아닐까?

오늘은 그런 생각을 했다

티비를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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