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감벤은 왜이리 약 이름 같냐

죽이는 것은 가끔 가장 책임 있는 행동, 심지어는 ‘좋은’ 행동일 수도 있지만 무고한 행동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정말로 무고하지 않음 속에서 살 수 있을까? 무고함에 대한 추구는 절멸주의와 마찬가지다. 필멸이라는 우리 삶의 조건에서는 생명우선이 아닌 지속우선의 태도가 필요하다. 판단에는 오류가 있기 마련이고 역사적으로 특수하며 특정 생명체를 위한 결정이지만 다른 생명체를 위한 것은 아니고, 어떤 사람들을 위한 결정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죽이게 된다. 왜 이렇게 인정하면 안되나? “사실 나는 고의로 죽음에 개입할 것이다. 이 섬에 사는 쥐와 고양이 모두가 지역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죽일 것이고, 이 행위를 완곡하게 표현하거나 변명을 덧붙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이 일을 해야만 하며, 동시에, 내가 무고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이런 죽임, 이런 죽음, 이 생명체 하나하나는, 중요하다.” 이것이 내가 “죽여도 되도록 만들지 않기”라는 말로 표현하려 하는 내용의 일부다. 삶과 죽음에 관련해 어떤 방식은 지지하고 다른 방식은 지지하지 않으려면, 그리고 바닥에 둥지를 트는 새들을 위해 행동하고 이 섬의 식물, 동물, 미생물 생태계를 부분적으로 복원하기 위해 나/우리는 죽여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침략종과 같은 용어 뒤에 숨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죽여도 되도록 만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우리”는 우리의 운을 함께 시험해보려는 “우리”인가 아닌가를 묻는 방식으로 이와 같은 세계화를 지지할 것이다.

<장을 담그는 할머니> 라는 이미지는 발효-미생물학적 이미지 연상과 관련되면 얼마나 해러웨이 적인가?


Comments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