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이 잘 안 되는 걸 보니 일기를 한 번 휘갈길 때가 됐나 보다.
어제 성아네 부부랑 완태 차를 타고 오전부터 공주엘 갔다. 막국수로 소문이 자자한 매향에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평양냉면과 물막국수를 시킨 완태와 성아는 음식을 남겼고 나만 혼자서 비빔 막국수를 다 먹었다. 면이 독특했는데, 어떤 느낌인지 설명하기 어렵지만 무척… ‘세로’의 맛이 났다. 하지만 1만 2천골이라는 값에 부응하는 대단한 맛은 아니었다. 이들 부부는 맛있는 커피만을 즐기기 때문에, 밥을 다 먹고 특별히 맛있는 커피를 마시러 반죽동 127..? 비스무리한 이름을 가진 어느 커피 가게로 향했다. 분명 영업시간은 11시 30분 부터라고 네이버 지도에 적혀있었는데 문이 닫혀 있어서, 오매불망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면서 커피집 바로 옆에 위치한 동네 서점 구경을 했는데 맥심 잡지가 거꾸로 뒤집혀진 채 매대에 올라와 있었다. 다시 뒤집어 표지를 보니 예의 그 헐벗은 여자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 유명한 공주사대부고가 있는 동네이기 때문에 학생들의 인권을 위해 일부러 표지를 뒤집어 놓으신 듯 하였다. 목차를 훑으니, 키스 특집이랍시고 제목마다 온통 키스가 가득했는데, 피쳐 기사 꼭지에 “키스해도 되는 여자, 안 되는 여자” 이딴 게 있었다. 너넨 그냥 여자랑 키스하지 말길 바란다… 너희에게 허락된 여자는 없다는 걸 양지하길 바란다…
장장 40여 분을 기다려 겨우 커피를 사 마시고 다시 대전으로 차를 돌렸다. 커피 맛은.. 특별함을 X축으로 놓고 맛있음을 Y축으로 놓았을 때 간신히 1사분면에 들 법한 정도의 커피였다고 할 수 있겠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국 가요들을 틀어두고 크게 따라 불렀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신록이 마음에 들고, 차에 탄 사람 셋 다 입을 모아 하나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게, 다들 즐거워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마음이 가득 찼다. 내가 이런 생각을 떠올린 바로 그 순간에 성아가 “행복하네” 이렇게.. 직접 입으로 말을 만들어 냈다. 성아는 행복하면 행복하다고 바로 말하는 사람이고, 나는 그걸 들으면서 뒷자석에서 음침하게 빙긋 웃는 사람. 하지만… 시시껄렁한 농담과 차창 밖의 초록과 대중가요로 합의된 어떤 정서의 일치가 만들어 내는, 흔하지만 잦게 찾아오진 않는 그 순간이 귀하다는 느낌은 나에게도 있다.
집에 돌아와서 기타 연습을 조금(정말 조금) 하다가 레슨 받으러 대흥동 가느냐고 간만에 차에 시동을 걸었다. 가면서 블러 에센셜 플리를 들었는데 문득, 세상에 천재가 참 많다는 느낌이.. 출생부터 다르게 운명지어진 인간 무리가, 범인과 천재의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게 물리적인 실체로 느껴졌다. 기타 레슨을 받다가 선생님께 이 이야기를 했는데(이유: E플랫 코드가 쥑어도 안 쳐져서) 선생님이 최선을 다해… 정말 열심히 나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15분 연습하고 이정도면 정말 잘하는 거예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연습하지도 않고도 잘하는 거예요 선생님… 세상에는 신이 내린 재능이라는 게 존재하고, 뮤지션들은 다섯 살 때 기타를 쥐자마자 F코드를 잡았다는 전설 같은 게 있잖아요…
그랬더니 선생님은 이제, 예빈씨는 소통을 잘 하시잖아요.. 눈 맞추고 대화를 잘 하시잖아요… 같은, “우린 모두 다 다른 달란트를 갖고 있고 당신에게도 그것이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류의 위로를 해줬다. 그걸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내가 너무 하찮아서… 내가 가진 달란트가 소통;의 달인…;;. 이라는 게 너무 대수롭지 않은 사소함으로 느껴져서. 세상엔 이렇게나 천재가 많은데 나는 그 중에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게 존나 억울해서. 그리고 동시에, 일주일 간 연습 꼴랑 15분 해놓고 안 된다고 난 왜 천재 아니냐고 질질 울고 있는 내자신이 철부지 쓰레기 그 자체라 자괴감에 눈물이 더 났다.
나는 너무 쉽게 상처를 받는다. 이놈의 진절머리나는 감상적 태도… 신경과민적 경향,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지나친 민감성.. 이 모든 게 나를 지치게 한다…
난왜천재아냐 소동 이후로 계속 은은한 우울을 느껴서 밤에는 완전히 신경적으로 탈진 상태가 됐다. 퇴근하고 주차장에 차 대자마자 운전석에 기대 누워 한참을 있어야 했다. 집에 올라갈 힘을 모으느라… 저녁약을 하루만 안 먹어도 금단현상 같은 게 온다. 고개를 돌리거나 회전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뇌가 머리를 한 박자 늦게 따라오는 느낌이 든다. 주변시도 약해져서 자꾸 옆에 누가 있는 줄 착각하고 한 번 더 쳐다보게 된다. 몸에 열이 오르고 녹초가 되기 일쑤다. 의―지로 이겨내야하는데 씨앙… . . . ..
어제 글씨 영감님이랑 돌에 미친 사람들(수석 수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미칠 게 없어서 돌에 미치냐고 했고 영감님은 “거북이 닮은 돌이 있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요지의 아리송한 말을 했다. 그러다 갑자기 “돌도 썩을 수 있다”는 기상천외한 소리를 하셔서 엄청 웃었다. 돌에 벌러지(벌레)가 기어다니면 돌도 썩게 된다는, 무슨 설화 같은 이야기를 너무나 당당하게 과학적 진리마냥 설파하셔서 파하하 웃었다. 영감님의 순수함이 가끔 나를 엄청 웃긴다. 어제도 직접 만드셨다는 교통카드 지갑을 구경했는데, 줄도 달려있고 대나무 막대기도 달려있는 와중에 웬 아파트 출입키까지 달려있길래 이건 뭐냐고 물으니, 길에서 주웠다고. 멋으로 달았다고 하신다. 남의 아파트 출입키를 길바닥에서 주워가지고 멋으로 달고다니시는 분은 할배가 유일할 거예요.
그런데 그러고 나서 영감님이 소매를 걷어 벌레에 잔뜩 물린 팔을 보여주셔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집안에 벌레가 끓는데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어, 계속 나와. 그런데 소주를 바르고 자면 조금 나아져요. 글씨 선생님에게 이런 빈곤의 흔적을 볼 때마다 세상에 증오를 품게 된다. 짜증나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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