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디트 헤르만, 『말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에세이』

하나의 이야기가 이야기라는 걸 무엇으로 확인할까. 하나의 단어가, 문장이, 혹은 물건이 한 이야기의 시작일 수 있다는 걸. 내가 깊은 우물 속에 내려뜨리는 측연. 이때 나는 무엇에 의지할까. 짐작건대 나는 특별한 본능에 의지한다. 무언가가 있다가 아니라 무언가가 없다고 당신에게 말하는 그 하나의 본능에. 우리가 가끔 쓰는 표현―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우리는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모를 때 이렇게 말하며, 이 표현은 늘 도피구이며 무언의 약속이다. 비록 네 말을 정말로 이해하지는 못해도 나는 그 뜻을 예감해. 혹은 달리 말하자면―나는 이해하고 싶어. 그리고 어쩌면 이걸로 충분할지 모른다.

나는 모종의 합의 형식, 공유된 인지의 형식이 존재한다는 데 의지하고 싶다. 그리고 비록 내가 누구나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안다고 여길지라도, 그럼에도 상식을 거스르며 끝까지 그것을 바꾸고자 하는 게 내게는 중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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